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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H₂O)이라는 주인공

화장품 전성분표의 첫 줄은 거의 언제나 같다. 정제수, 곧 물이다. 토너든 로션이든 크림이든, 맨 앞에 물이 앉아 있다. 0강에서 우리는 성분이 많이 든 순서대로 적힌다는 규칙을 익혔다. 그렇다면 맨 앞의 물은 가장 많이 든 성분이라는 뜻이다. 화장품의 상당수는 부피의 60%에서 90%대가 물이다.

여기서 의심이 든다. 물을 잔뜩 넣고 비싸게 파는 물장사가 아닌가. 물은 그저 자리만 채우는 들러리 아닌가. 0강 끝에서 “물은 왜 늘 맨 앞에 있나”라는 질문을 남겨두었다. 이제 답할 차례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물은 들러리가 아니라 무대다. 다른 성분들이 그 위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떠받치는 바탕이다. 그리고 그 바탕의 힘은 물 분자의 생김새에서 나온다.

물은 산소 하나에 수소 둘이 붙은 분자다. 화학식 H₂O는 누구나 안다. 그런데 이 셋이 어떻게 붙어 있느냐가 물의 거의 모든 성질을 만든다.

물 분자는 일직선이 아니라 가운데가 살짝 꺾인 모양이다. 산소를 꼭짓점으로 두 수소가 약 104.5°로 벌어져 있다. 부메랑이나 알파벳 V를 떠올리면 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해진다. 산소는 수소보다 전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세다. 그래서 산소와 수소가 나눠 갖던 전자가 산소 쪽으로 슬쩍 치우친다. 2강에서 본 공유결합, 곧 전자를 나눠 갖는 결합이되 그 나눔이 공평하지 않은 셈이다.

전자는 음전하를 띤다. 전자가 산소 쪽으로 쏠리면 산소 쪽은 살짝 음전하를, 수소 쪽은 살짝 양전하를 띤다. 분자가 꺾여 있으니 이 치우침이 서로 상쇄되지 않고 남는다. 결국 한 분자 안에서 산소 머리는 음(−), 수소 두 끝은 양(+)으로 갈린다. 한쪽은 음극, 한쪽은 양극인 작은 자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양극과 음극이 갈린 성질을 극성(polarity)이라 부른다.

여기서 모양이 결정적이라는 점을 짚어둘 만하다. 이산화탄소(CO₂)도 산소가 전자를 끌어당겨 결합마다 치우침이 생긴다. 하지만 이산화탄소는 일직선이라 양쪽의 치우침이 크기는 같고 방향이 반대라 서로 지워진다. 그래서 무극성이다. 같은 재료라도 꺾이면 극성, 펴지면 무극성. 물이 특별한 것은 꺾여 있기 때문이다.

물 분자의 극성 (산소 δ−, 수소 δ+) 굽은 물 분자 — 산소 머리는 음(−), 수소 두 끝은 양(+)으로 치우쳐 극성을 띤다

직선형 이산화탄소 분자 직선형 CO₂ — 양쪽 치우침이 서로 상쇄돼 무극성이 된다

물 분자 하나가 작은 자석이라면, 자석 여럿을 한자리에 두면 어떻게 될까. 한 분자의 양(+)인 수소 끝이 옆 분자의 음(−)인 산소 쪽에 들러붙는다. 분자와 분자가 손을 잡는 셈이다. 이 끌림을 수소결합(hydrogen bonding)이라 한다.

수소결합은 약하다. 2강에서 본, 분자 안에서 원자를 묶는 진짜 결합에 비하면 훨씬 헐겁다. 잡았다 놓았다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약한 손이다. 그런데 물 분자는 사방의 이웃과 동시에 손을 잡아 거대한 그물을 짠다. 손 하나하나는 약해도 수가 많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그물이 물의 익숙한 성질들을 만든다. 물은 비슷한 무게의 다른 분자들이 기체로 떠도는 온도에서도 액체로 남는다. 끓이려면 먼저 이 손들을 떼어내는 데 열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소금쟁이가 수면 위에 뜨는 것도, 컵에 물을 아슬아슬 봉긋하게 채울 수 있는 것도 표면의 분자들이 서로 손을 놓지 않는 까닭이다. 물이 어딘가 끈끈하게 느껴진다면, 그 끈끈함의 정체가 바로 이 손잡기다.

물 분자 사이의 수소결합 그물 한 분자의 수소(+)가 이웃 분자의 산소(−)에 이어져 그물을 짠다

극성과 수소결합을 알고 나면, 물이 왜 무대가 되는지 풀린다.

소금을 물에 넣으면 사라지듯 녹는다. 소금은 양전하를 띤 나트륨과 음전하를 띤 염소가 맞붙어 있는 물질이다. 물에 들어가면 물 분자의 음(−)인 산소 쪽이 나트륨에, 양(+)인 수소 쪽이 염소에 달라붙어 둘을 양쪽에서 잡아당겨 떼어낸다. 떨어진 입자는 물 분자들에 둘러싸여 흩어진다. 작은 자석들이 소금을 분해해 데리고 다니는 그림이다.

이처럼 극성을 띤 물은 전기적으로 치우친 물질, 곧 자신과 닮은 성질의 물질을 잘 녹인다. 화학에는 이를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녹인다”는 말로 정리한 표현이 있다. 물이 그토록 많은 것을 녹이다 보니 흔히 보편 용매라고도 불린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어떤 액체보다 많이 녹인다”는 뜻이지, 모든 것을 녹인다는 말은 아니다. 이 단서가 다음 강의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화장품에서 정제수가 하는 일이 분명해진다. 미백이나 보습을 노리고 넣는 성분 중 상당수는 물에 녹는 수용성이다. 이들을 풀어 고르게 퍼뜨리는 것이 물이다. 물이 성분을 녹여 품고, 그 용액이 피부 위에 얇고 균일하게 펴 발린다. 첫 줄의 정제수는 자리만 채우는 들러리가 아니라, 나머지 성분이 그 위에서 일하도록 떠받치는 용매이자 무대인 셈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화장품에 쓰는 물은 수돗물이 아니라 정제수다. 미네랄과 불순물을 걸러낸 물이다. 수돗물에 든 칼슘이나 금속 성분은 제형을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활성성분을 망가뜨릴 수 있어, 제조 과정에서 깨끗이 정제한 물을 쓴다.

물이 보편 용매라면, 못 녹이는 것은 없을까. 있다. 기름이다.

기름은 전기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무극성 물질이다. 물 입장에서 손잡을 자리가 없다. 게다가 물 분자들끼리는 수소결합으로 워낙 단단히 뭉쳐 있어서, 그 사이에 기름을 끼워주기보다 자기들끼리 뭉쳐 있으려 한다. 밀려난 기름은 따로 떠서 층을 이룬다. 물과 기름을 한 병에 넣고 흔들어도 곧 두 층으로 갈라지는 이유다. 물끼리 너무 친해서 기름을 끼워주지 않는다고 해도 좋다.

엄밀히는 여기에 더 깊은 이유가 있지만, 그 설명은 이 강의의 폭을 넘으니 뒤로 미룬다. 지금은 물과 기름이 왜 따로 노는지, 그 문제만 손에 쥐면 충분하다.

문제가 생겼으니 답도 있어야 한다. 화장품 대부분은 물과 기름을 함께 담는다. 로션도 크림도 둘이 섞인 제형이다. 서로 밀어내는 둘을 어떻게 한 병에 담아 매끄러운 크림으로 만들까. 그 일을 해내는 중매쟁이가 따로 있다. 물 쪽과 기름 쪽에 동시에 손을 내미는 성분, 계면활성제다. 그것이 어떻게 둘을 잇는지는 10강에서 풀어간다.

다음 강의에서는 물에서 한 걸음 나아가, 물의 또 다른 얼굴인 산성과 알칼리성을 다룬다. 화장품마다 적힌 pH라는 숫자가 무엇이며, 왜 피부에 그것이 중요한지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