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의 두 얼굴 — "무알코올"의 알코올은 어떤 알코올인가
앞면에는 큼직하게 ‘무알코올’이라 적힌 토너가 있다. 뒤로 돌려 성분표를 읽으면 ‘Cetyl Alcohol’, ‘Glycerin’ 같은 이름이 보인다. 세틸알코올은 아예 이름에 ‘alcohol’을 달고 있고, 글리세린은 글리세롤이라는 알코올의 상용명이다. 앞면은 알코올이 없다 하고, 뒷면에는 알코올이 적혀 있다.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일까. 그렇지 않다. 둘 다 사실이다. 비밀은 ‘알코올’이라는 말 한 단어에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데 있다.
알코올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집안의 성씨다
섹션 제목: “알코올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집안의 성씨다”‘알코올’ 하면 흔히 떠올리는 것은 하나다. 술이나 손소독제의 그 알코올, 코를 찌르고 금방 마르는 그것. 그런데 화학에서 말하는 알코올은 그렇게 좁지 않다. 한 가지 물질의 이름이 아니라, 어떤 공통점을 가진 분자들을 한데 묶어 부르는 큰 분류의 이름이다.
그 공통점이 7강에 나왔던 단추 하나다. 탄소 골격 어딘가에 산소와 수소가 붙은 작은 부위, 하이드록시기(-OH). 이 -OH 단추를 하나라도 단 분자를 화학에서는 알코올이라 부른다. 이름이 ‘-올(-ol)‘로 끝나면 이 단추가 달려 있다는 신호라고 7강에서 짚었다. 메탄올, 에탄올, 글리세롤이 다 그런 식구다.
그러니 알코올은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 집안의 성씨에 가깝다. ‘김’씨가 한둘이 아니듯, 알코올이라는 성을 가진 분자도 수없이 많다. 같은 성을 쓴다고 같은 사람은 아니다. 에탄올과 세틸알코올과 글리세린은 모두 -OH라는 같은 성을 쓰지만, 분자로 보면 전혀 다른 사람이다. 한쪽은 피부를 말리고, 다른 한쪽은 오히려 촉촉하게 한다.
여기서 7강의 이야기가 한 겹 깊어진다. 7강에서는 단추가 분자의 성격을 정한다고 했다. -OH가 달리면 물과 친한 성질이 생긴다고. 그 말은 지금도 옳다. -OH는 어느 분자에 붙든 물과 손을 잡으려 한다(3강의 수소결합). 다만 분자의 운명을 -OH 하나가 다 쥐는 것은 아니다. 같은 단추를 달았어도 그 단추를 매단 몸통이 얼마나 길고 기름진가, 단추가 한 개인가 여러 개인가에 따라 분자는 정반대로 갈린다.
같은 -OH 단추를 공유하는 세 분자 — 탄소 2개의 에탄올, 탄소 16개의 세틸알코올, -OH 3개의 글리세린. 같은 성씨, 다른 사람.
말리는 알코올 — 에탄올
섹션 제목: “말리는 알코올 — 에탄올”먼저 우리가 아는 그 알코올, 에탄올이다. 탄소가 단 두 개뿐인 작고 가벼운 분자다. 술과 손소독제에 든 것이 이것이고, 화장품 성분표에는 보통 ‘Alcohol’이라고만 적히거나 ‘Alcohol Denat.‘로 적힌다.
가벼운 만큼 잘 날아간다. 피부에 닿으면 금세 증발한다. 손소독제를 바르면 금방 마르는 것이 이 휘발성 때문이다. 화장품에서 에탄올은 다른 성분을 녹여 펴 바르기 좋게 하고, 발랐을 때 산뜻하고 빨리 마르는 느낌을 준다. 토너나 미스트, 가벼운 젤, 일부 선크림이 이 성질을 빌려 쓴다.
문제는 에탄올이 기름기도 어느 정도 녹인다는 데 있다. 피부 표면에는 수분이 날아가지 않게 붙잡는 얇은 지질 층이 있는데, 에탄올이 그 일부를 함께 끌고 나갈 수 있다. 농도가 높고 자주, 오래 닿을수록 이 효과는 커진다. 그래서 고농도 에탄올을 반복해 쓰면 피부가 당기고 건조해질 수 있다.
다만 ‘에탄올이 들어갔으니 무조건 피부가 상한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작용의 세기는 농도와 닿는 시간, 빈도에 달려 있다. 손을 자주 닦는 고농도 소독제와 다른 성분에 소량 섞인 화장품 속 에탄올은, 같은 물질이라도 피부에 닿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실제로 에탄올은 같은 계열의 다른 소독용 알코올들과 견주면 오히려 순한 축에 든다는 연구도 있다. “독은 양이 만든다”는 0강의 원칙이 여기서도 그대로다. 이름이 아니라 양과 조건이 결과를 가른다.
‘변성알코올’이라는 말도 짚고 가자. ‘Alcohol Denat.‘의 ‘변성’은 무섭게 들리지만, 마시지 못하도록 쓴맛 나는 첨가물을 섞었다는 뜻일 뿐이다. 산업용 독극물로 바꿨다는 말이 아니며, 피부에 닿았을 때의 작용은 보통 에탄올과 같다.
촉촉하게 하는 알코올 — 세틸알코올과 글리세린
섹션 제목: “촉촉하게 하는 알코올 — 세틸알코올과 글리세린”이번에는 정반대 식구다. 같은 알코올 성씨를 쓰는데, 하는 일은 거꾸로다.
세틸알코올부터 보자. 이름만 보면 에탄올의 친척 같지만 분자는 딴판이다. 에탄올의 탄소가 둘이라면 세틸알코올은 탄소가 열여섯이다. 긴 기름 사슬 끝에 -OH 단추 하나가 달린 모양이라, 분자의 거의 전부가 기름인 셈이고 성질도 기름을 닮는다. 상온에서 양초 왁스 같은 흰 고체이고 잘 증발하지도 않는다. 에탄올이 휘발유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분자라면, 세틸알코올은 양초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분자다.
그러니 에탄올과 정반대로 행동한다. 날아가지 않으니 피부를 말릴 일이 없고, 표면에서 부드럽게 펴진다. 크림이나 로션에서 세틸알코올은 발림성을 좋게 하고, 물과 기름이 분리되지 않게 붙잡아 제형을 안정시킨다. 비슷한 스테아릴알코올, 둘을 섞은 세테아릴알코올도 같은 집안이다. 흔히 지방알코올이라 묶어 부른다.
글리세린은 또 다른 방식으로 촉촉하다. -OH 단추를 무려 세 개나 달고 있다. -OH가 물을 끌어당긴다고 했으니, 그것이 셋이면 더 강하게 잡아당긴다. 그래서 글리세린은 공기와 피부에서 수분을 끌어와 붙드는 보습 성분으로 일한다. 보습 화장품에 가장 흔히 들어가는 성분 중 하나다.
같은 -OH인데 결과가 이렇게 갈리는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진다. 범인은 -OH 단추 자체가 아니다. 에탄올은 단추를 매단 몸통이 짧고 가벼워서 날아가며 기름기를 걷어내고, 세틸알코올은 몸통이 길고 무거워 기름처럼 눌러앉으며, 글리세린은 단추가 여럿이라 물을 움켜쥔다. 같은 성씨, 다른 사람이라는 말의 실물이 이것이다.
한 가지는 솔직히 덧붙여 둔다. 지방알코올이 보습 쪽이라 해서 누구에게나 아무 자극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드물게 세테아릴알코올에 반응하는 경우도 보고된다. ‘에탄올보다 순하다’까지는 말할 수 있어도 ‘절대 무자극’은 과장이다. 이름이 아니라 사람마다의 피부가 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무알코올”은 무슨 뜻인가
섹션 제목: “그래서 “무알코올”은 무슨 뜻인가”이제 처음의 모순으로 돌아간다. 앞면의 ‘무알코올’과 뒷면의 ‘Cetyl Alcohol’은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는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라벨 기준을 보면 답이 나온다. 화장품 라벨에서 ‘알코올(alcohol)‘이라고만 단독으로 쓰면, 그것은 에틸알코올, 곧 에탄올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 따라서 ‘무알코올(alcohol free)‘은 ‘에탄올이 없다’는 뜻이지, ‘-OH를 가진 모든 알코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세틸알코올이나 글리세린 같은 지방알코올·폴리올은 들어 있어도 ‘무알코올’을 붙일 수 있다.
낯설게 들리지만 비슷한 표시를 우리는 이미 안다. ‘땅콩 무첨가’라고 적힌 과자에 아몬드나 호두는 들어 있을 수 있다. 빠진 것은 딱 한 가지, 땅콩이다. ‘무알코올’에서 빠진 한 가지는 에탄올이다. 그러니 글리세린이 든 ‘무알코올’ 토너는 거짓말이 아니라 정의 그대로인 셈이다.
다만 단서가 하나 있다. 위의 정의는 미국 FDA 기준이다. 한국 식약처에 똑같은 문구의 규정이 있는지는 이 글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같다. ‘무알코올’이라는 글자는 ‘말리는 그 알코올이 없다’는 약속이지, 알코올 성씨 전체를 추방했다는 선언이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 7강에서 미뤄 둔 숙제가 풀린다. 같은 -OH 단추를 달고도 왜 어떤 알코올은 말리고 어떤 알코올은 촉촉하게 하는가. 답은 단추가 아니라 그 단추를 매단 몸통에 있었다. 0강에서 “이름이 -올로 끝나는 것들”이라며 미뤄 둔 이야기도 여기서 한 묶음이 된다. 에탄올, 글리세롤, 세틸알코올 — 다 같은 알코올 집안이었다.
한 가지 실마리는 남겨 두자. 방금 세틸알코올이 물과 기름을 분리되지 않게 붙잡는다고 했다. 3강에서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 해 놓고도, 우리는 매일 둘이 섞인 크림과 클렌저를 쓴다. 그 둘을 어떻게 한 통에 담는가. 다음 강에서는 그 사이에 끼어들어 둘을 중매하는 분자, 계면활성제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