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Enzyme)란 무엇인가
부엌에는 자기 몸을 닳지 않고 일하는 도구가 있다. 칼은 양파를 썰고, 강판은 무를 갈고, 믹서는 과일을 으깬다. 일을 마치면 도구는 그대로 남는다. 씻어서 다음 요리에 또 쓴다. 재료는 잘게 바뀌지만 칼날은 줄지 않는다.
우리 몸 안에도 그런 도구가 있다. 그것도 수천 종이. 음식을 소화하고, 세포를 만들고, 낡은 것을 허무는 거의 모든 화학 반응에는 이 도구가 끼어 있다. 자기 몸은 닳지 않으면서 반응만 거들고, 일이 끝나면 다음 반응으로 옮겨가 또 일한다. 이름은 효소(enzyme)다.
효소가 화장품으로 건너오면 이야기가 한층 흥미로워진다. 파파야와 파인애플을 으깨 얼굴에 바르면 묵은 각질이 벗겨진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법이 아니다. 그 과일 안에 든 효소가 죽은 각질을 붙들어 둔 단백질을 끊어 떼어 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피부는 건드리지 않고, 들떠 있는 각질만 골라서. 어떻게 골라낼 수 있는지, 산으로 녹이는 각질 관리와는 무엇이 다른지—그 답이 이 강의에 있다.
효소는 반응을 빠르게 하는 일꾼이다
섹션 제목: “효소는 반응을 빠르게 하는 일꾼이다”화학 반응에는 대개 문턱이 있다. 두 물질이 만나 새 물질이 되려면 처음에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이 처음의 문턱을 활성화에너지라 부른다. 문턱이 높으면 반응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도 아주 느리다. 가만히 두면 몇 년이 걸릴 반응도 있다.
효소가 하는 일이 바로 이 문턱을 낮추는 것이다. 칼이 단단한 재료를 미리 다듬어 조리를 쉽게 해 주듯, 효소는 반응이 넘어야 할 언덕을 낮춰 쉬운 길을 터 준다. 문턱이 낮아지면 같은 온도에서도 반응을 넘어서는 분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 결과 효소는 반응 속도를 100만 배 넘게 끌어올린다. 효소가 없으면 몇 년 걸릴 일이 효소 한 분자만 있으면 1초도 안 돼 끝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효소는 반응에 무언가를 보태 주는 것이 아니다. 재료나 에너지를 더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작의 문턱만 낮춘다. 그래서 반응이 끝나도 효소 자신은 멀쩡하게 남는다. 칼이 양파를 썰어도 칼날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멀쩡히 남은 효소는 다음 반응으로 가 또 일한다. 적은 양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여기 있다. 효소가 들어간 화장품에 그 성분이 아주 조금만 적혀 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효소는 소모되지 않으니까.
둘째, 효소는 일어나지 않을 반응을 억지로 일으키지는 못한다. 본래 일어날 반응을 빠르게 할 뿐이다. 이 구분이 효소를 둘러싼 과장을 가려내는 첫 잣대가 된다. “효소가 들었으니 무조건 강력하다”, “많이 넣을수록 좋다”는 말은 촉매의 성질과 어긋난다. 양보다 중요한 것은 그 효소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상태인지, 곧 살아 있는지다. 뒤에서 보겠지만, 죽은 효소는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일하지 못한다.
열쇠와 자물쇠처럼, 정해진 짝에만 작동한다
섹션 제목: “열쇠와 자물쇠처럼, 정해진 짝에만 작동한다”효소는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지 않는다. 한 효소는 정해진 한 가지 일만 한다. 지방을 다루는 효소는 지방만, 단백질을 다루는 효소는 단백질만 상대한다. 이 깐깐함을 기질 특이성이라 한다. 효소가 상대하는 그 정해진 재료를 기질이라 부른다.
이 까다로움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비유가 열쇠와 자물쇠다. 효소 표면에는 활성부위라는 특정한 홈이 있다. 자물쇠의 열쇠 구멍처럼 모양이 정해져 있어서, 거기에 꼭 맞는 기질만 들어맞는다. 모양이 다른 분자는 헛돈다. 19세기 말, 한 화학자가 효소와 기질의 관계를 이 열쇠-자물쇠 모형으로 설명했고, 그 직관은 지금도 효소의 선택성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다만 실제 효소는 쇠로 만든 자물쇠보다 조금 더 유연하다. 활성부위는 단단하게 굳은 틀이 아니라, 기질이 들어오면 그 모양에 맞춰 살짝 오므라드는 장갑에 가깝다. 손을 끼우면 손가락 모양대로 맞춰지는 장갑처럼, 효소도 기질을 맞이하며 모양을 미세하게 조정해 더 단단히 물린다. 이 보강된 그림을 유도적합이라 부른다. 열쇠-자물쇠가 “왜 골라서 작동하는가”를 설명한다면, 유도적합은 “왜 그렇게까지 효율이 높은가”를 마저 설명한다.
이 선택성에는 흔적이 이름에 남아 있다. 효소 이름은 대개 다루는 기질에 “-아제(-ase)“를 붙여 만든다. 지방(lipid)을 다루면 라이페이스, 단백질(protein)을 다루면 프로테이스. 이름만 봐도 무엇을 상대하는 효소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단백질분해효소 가운데 일부는 오래전부터 굳은 이름을 그대로 써서 “-인(-in)“으로 끝난다. 잠시 뒤 만날 파파인이 그렇다.
한 가지 오해는 짚고 가자. 효소가 똑똑해서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만 골라 없앤다”는 식의 설명이다. 효소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활성부위에 닿는, 모양이 맞는 기질만 자를 뿐이다. 효소가 묵은 각질만 떼어 내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의지가 아니라 구조 때문이다. 그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그래서 화장품에서는? 묵은 각질만 끊어 내는 가위
섹션 제목: “그래서 화장품에서는? 묵은 각질만 끊어 내는 가위”
각질세포들이 코르네오데스모솜이라는 단백질 리벳으로 서로 붙어 있는 그림 — 효소가 그 리벳을 잘라 표면 각질만 떨어져 나가는 장면
피부 가장 바깥에는 죽은 세포, 곧 각질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 각질들은 그냥 얹혀 있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로 된 작은 리벳으로 서로 단단히 붙들려 있다. 이 단백질 이음새를 끊어 주면 각질이 떨어져 나간다. 평소에는 우리 몸이 알아서 이 일을 하지만, 묵은 각질이 잘 떨어지지 않으면 피부가 칙칙하고 거칠어진다.
여기에 쓰이는 것이 단백질을 끊는 효소다. 대표가 파파야에서 얻는 파파인, 파인애플에서 얻는 브로멜라인이다. 둘 다 단백질의 이음새를 가위처럼 끊는 효소다. 이 효소들이 각질을 붙들어 둔 단백질 리벳을 잘라 결속을 풀면, 표면의 죽은 각질이 떨어져 나간다. 묵은 각질만 벗겨지는 까닭은 표적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끊어야 할 단백질 이음새는 표면의 죽은 각질에 노출되어 있고, 살아 있는 세포는 그 아래 장벽 안쪽에 있어 효소의 가위가 닿지 않는다.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닿는 곳만 자르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산을 쓰는 각질 관리와 갈라진다. AHA나 BHA 같은 산도 각질을 떼어 내지만, 길이 다르다. 산은 각질을 붙든 이음새를 산성 환경으로 약하게 만들어 풀어 놓는 쪽이라면, 효소는 그 이음새의 단백질 결합을 직접 끊는다. 녹이는 것과 자르는 것의 차이다. 그래서 효소 필링은 산보다 일반적으로 더 순하다고 알려져 있다. 살아 있는 세포를 덜 건드리기 때문이다. 다만 이 “순함”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농도가 진하거나 너무 오래 두면 효소 필링도 자극이 된다. 천연 과일에서 왔다는 사실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파파인과 브로멜라인은 알레르기를 일으킨다는 보고가 있다. 천연이라는 말과 순하다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니다.
이제 17강에서 따라온 한 가지를 거둘 차례다. 효소도 결국 단백질이라는 사실이다. 단백질은 정교하게 접힌 입체 구조가 곧 기능이다. 그 접힌 모양이 흐트러지면 기능도 사라진다. 이 풀림을 변성이라 하고, 한번 풀린 단백질은 대개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열쇠 구멍의 모양이 망가진 자물쇠를 떠올리면 된다. 효소가 변성되면 활성부위의 모양이 무너지고, 기질이 들어맞을 자리가 사라진다. 그 순간 효소는 죽는다. 아무리 많이 들어 있어도 일하지 못한다.
무엇이 단백질의 접힘을 흐트러뜨릴까. 대표가 온도와 pH다. 다만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바로잡아야 한다. “효소는 미지근한 온도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많은 효소가 체온 근처에서 가장 잘 일하는 것은 맞지만, 모든 효소가 그런 것은 아니다. 파파인과 브로멜라인은 오히려 열에 제법 강해서, 60도를 넘는 온도에서도 활발히 일한다. 그러니 효소를 두고 한 가지 최적 온도를 못 박을 수는 없다. 효소마다 좋아하는 조건이 다르되, 충분히 높은 온도와 극단적인 pH에 이르면 어떤 효소든 결국 접힘이 풀려 변성된다—이 정도가 정확한 그림이다.
pH의 영향은 4강에서 미리 심어 둔 떡밥이다. 효소마다 가장 잘 일하는 산성도 구간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면 활성이 떨어진다. 파파인은 대략 약산성에서 중성 사이를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출처마다 수치가 조금씩 다르므로 한 점으로 못 박기는 어렵지만, 효소 필링 제품의 pH를 그 구간에 맞추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제형의 pH가 어긋나면 아무리 좋은 효소를 넣어도 일을 못 한다. 4강에서 pH가 왜 중요하냐고 물었다면, 효소가 그 답의 하나다.
이 약점은 화장품 진열대에 흔적을 남긴다. 효소 세안제가 유독 가루 형태로 많이 나오는 까닭이다. 효소는 물 속에 오래 머물면 활성을 잃거나 심지어 자기들끼리 서로를 분해해 버린다. 단백질을 끊는 효소가 곁에 있는 다른 효소 단백질을 끊는 것이다. 그래서 효소를 물에 섞어 둔 채로 오래 보관하기가 어렵다. 해법은 물을 빼는 것이다. 효소를 마른 가루 상태로 가둬 두었다가, 쓸 때 물과 만나 비로소 깨어나게 한다. 손바닥에서 물에 개어 거품을 내는 가루 세안제의 상당수가 이 원리를 따른다. 다만 모든 가루 세안제가 효소 때문에 가루인 것은 아니다. 거품이나 사용감을 위한 가루도 있다. 가루형이 곧 효소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음 강 예고
섹션 제목: “다음 강 예고”효소 한 종을 따라가는 동안 우리는 두 번 뒤를 돌아봤다. pH가 왜 중요한지 물었던 4강과, 단백질의 접힌 모양이 곧 기능이라던 17강이다. 효소는 그 두 갈래가 만나는 자리에 서 있다. 단백질이기에 접힘이 풀리면 죽고, 그 풀림을 부르는 것이 온도와 pH이니 말이다.
다음 강에서는 효소가 자르던 그 각질로 시선을 옮긴다. 묵은 각질을 떼어 낸 자리 아래, 피부가 어떻게 벽돌과 시멘트처럼 층층이 쌓여 장벽을 이루는지를 들여다본다. 효소가 끊은 단백질 리벳이 사실 그 장벽 구조의 일부였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