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면활성제 — 물과 기름을 중매하는 분자
3강에서 약속 하나를 남겼다. 물과 기름은 죽어도 섞이지 않는다고, 그 이유를 머리 둘 달린 자석과 손잡기로 풀어 보였다. 물 분자들끼리 수소결합으로 너무 단단히 뭉쳐 있어서 기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그러면서 한 가지를 미뤄 두었다. 물과 기름이 그토록 서로를 밀어내는데, 어째서 욕실 선반의 클렌징폼도 로션도 크림도 전부 물과 기름을 한 통에 담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답은 둘 사이에 끼어드는 제3의 분자에 있다. 절대 어울리지 않는 두 집안 사이에 서서, 한 손으로는 물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기름의 손을 잡아주는 중매쟁이. 그 분자의 이름이 계면활성제(surfactant)다. 이번 강의의 주인공이며, 화장품이라는 물건을 가능하게 만드는 숨은 설계자다.
한 분자에 두 얼굴
섹션 제목: “한 분자에 두 얼굴”중매가 성립하려면 양쪽 모두와 말이 통해야 한다. 물하고만 친하면 기름을 못 데려오고, 기름하고만 친하면 물 쪽이 등을 돌린다. 계면활성제가 특별한 것은 한 분자 안에 정반대 성격의 두 끝을 동시에 지녔다는 점이다.
한쪽 끝은 물을 좋아한다. 3강에서 본 극성을 띠거나 전하를 가져서 물 분자의 자석 같은 성질에 잘 들러붙는다. 이쪽을 친수성 머리라 부른다. 반대쪽 끝은 물을 싫어하고 기름과 어울린다. 대개 길게 뻗은 탄소 사슬로, 물에서는 겉돌지만 기름 속에서는 편안하다. 이쪽이 소수성 꼬리, 곧 기름과 친한 꼬리다. 머리는 물 쪽으로 내민 손, 꼬리는 기름 쪽으로 내민 손인 셈이다. 이렇게 물과 기름을 둘 다 사랑하는 두 얼굴을 한 몸에 가진 성질을 양친매성(amphiphilic)이라 한다.
동그란 친수성 머리(물 쪽 손)에 긴 소수성 꼬리(기름 쪽 손)가 달린 양친매성 분자.
이 두 얼굴이 분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물에 풀어 놓으면 꼬리는 어떻게든 물에서 벗어나려 하고 머리는 물에 남으려 한다. 그래서 분자들은 가장 손쉬운 타협점을 찾아간다. 물과 공기가 만나는 표면, 또는 물과 기름이 만나는 경계로 몰려가 머리는 물에 담그고 꼬리는 물 밖으로 내민 채 줄지어 늘어선다. 물과 다른 것이 맞닿는 면을 계면이라 하는데, 이 분자들이 바로 그 계면에 모여들어 성질을 바꿔 놓는다. ‘계면을 활성화한다’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계면에 분자가 늘어서면 그 경계의 긴장이 풀린다. 물 표면이 팽팽하게 당겨져 소금쟁이를 떠받치던 그 힘, 곧 표면장력이 약해진다. 물과 기름 사이의 경계도 마찬가지로 느슨해진다. 팽팽하던 경계가 헐거워지니, 물과 기름이 비로소 섞일 여지가 생긴다. 중매쟁이가 두 집안 사이의 어색한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계면활성제는 머리의 성격에 따라 몇 갈래로 나뉘는데, 그 갈래가 곧 쓰임새를 가른다. 세정에 강한 것이 따로 있고 머리카락을 코팅하는 것이 따로 있다.
일정 수가 모이면 공을 이룬다
섹션 제목: “일정 수가 모이면 공을 이룬다”물에 계면활성제를 조금씩 더 넣어 보자. 처음에는 분자들이 죄다 표면으로 달려간다. 표면에 머리를 담그고 꼬리를 내미는 자리가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 넣다 보면 표면이 분자로 빽빽하게 차서 더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갈 곳을 잃은 분자들은 물속에서 새로운 해법을 찾는다.
서로의 꼬리를 안쪽으로 모으고 머리를 바깥으로 두른 작은 공을 만드는 것이다. 꼬리들은 공 한가운데로 모여 자기들끼리 기름 같은 속을 이루고, 물을 좋아하는 머리들은 바깥에서 물과 맞닿는다. 물 싫은 부분을 안에 숨기고 물 좋은 부분만 밖으로 드러낸 구조다. 이 공 모양 집합체를 미셀(micelle)이라 한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분자들이 스스로 가장 안정된 모양으로 뭉치니, 이를 자기조립이라 부른다.
꼬리를 안으로 모으고 머리를 밖으로 향한 미셀 — 가운데는 기름 같은 코어, 바깥은 물과 맞닿는 머리. (이미지: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미셀은 아무 때나 생기지 않는다. 농도가 어느 선을 넘어서야 비로소 만들어진다. 사람이 몇 명 안 모이면 원을 그릴 수 없다가, 일정 인원을 넘기면 비로소 둥글게 손을 잡고 원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이 문턱이 되는 농도를 임계미셀농도(CMC)라 한다. 이 선 아래에서는 분자들이 표면에만 늘어서 있고 표면장력이 농도에 따라 뚝뚝 떨어진다. 그러다 이 선을 넘으면 표면이 이미 다 찼으므로 더 넣은 분자는 모두 미셀로 가고, 표면장력은 더 내려가지 않고 평평해진다. 표면장력 그래프가 꺾이는 그 지점이 곧 임계미셀농도다.
화장품과 세제는 이 문턱을 한참 웃도는 농도로 만든다. 미셀이 넉넉히 있어야 다음에 볼 세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미셀이라는 말이 어느 클렌징워터의 이름으로 쓰이면서 무슨 첨단 기술처럼 들리지만, 미셀은 100년도 더 전부터 알려진 기본 물리현상이다. 비누 거품 속에도 미셀은 가득하다.
내보내느냐, 잡아두느냐
섹션 제목: “내보내느냐, 잡아두느냐”이제 화장품으로 내려온다. 계면활성제가 화장품에서 하는 일은 크게 둘이다. 때를 빼는 세정과 크림을 만드는 유화. 언뜻 정반대로 보이지만, 둘 다 같은 양친매성 한 가지에서 나온다. 차이는 단 하나, 떼어낸 기름을 내보내느냐 잡아두느냐다.
세정부터 보자. 피부나 머리카락에는 피지와 화장품이 엉긴 기름때가 붙어 있다. 물만으로는 안 떨어진다. 물이 기름을 싫어해 때 표면에서 미끄러지기만 하는 까닭이다. 여기에 계면활성제가 들어가면 분자들이 기름때와 물 사이 경계에 달라붙는다. 꼬리는 기름때에 박고 머리는 물 쪽으로 내민다.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표면에 납작하게 퍼져 있던 기름때가 점점 동그랗게 말려 올라가다 마침내 떨어져 나온다. 떨어진 기름방울은 곧장 미셀 속에 갇힌다. 꼬리들이 기름을 한가운데로 감싸 안고 머리가 바깥에서 물과 맞닿으니, 기름을 품은 채 물에 둥둥 뜰 수 있다. 그 상태로 헹구면 기름때는 미셀이라는 택시에 실려 물과 함께 떠내려간다. 씻는다는 행위의 정체가 이것이다. 기름때를 미셀에 가둬 헹궈내는 일.
유화는 방향이 반대다. 떼어내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섞어서 붙잡아 두는 것이 목표다. 로션이나 크림은 물과 기름을 한 통에 담은 제형이다. 그냥 섞으면 3강에서 본 대로 곧 두 층으로 갈라진다. 그래서 먼저 휘저어 기름을 잘게 부숴 작은 방울로 흩뜨린다. 그러나 가만두면 방울들이 다시 만나 합쳐지고 결국 큰 기름층으로 돌아간다. 이때 계면활성제가 각 기름방울 표면을 빙 둘러싼다. 꼬리는 기름방울 안쪽에 박고 머리는 바깥 물 쪽으로 내밀어 방울마다 얇은 막을 입힌다. 이 막이 방울끼리 다시 들러붙는 것을 막아 잘게 흩어진 상태를 그대로 붙잡아 둔다. 물 위에 기름방울이 흩어진 가벼운 제형이 로션이고, 반대로 기름 속에 물방울이 흩어지면 더 묵직한 크림이 된다. 이렇게 안정되게 섞인 상태를 에멀션이라 한다.
세정은 기름때를 미셀에 가둬 헹궈내고, 유화는 기름방울마다 막을 둘러 합쳐지지 못하게 붙잡는다. 같은 분자, 반대 목표. (이미지: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같은 분자가 같은 방식으로 기름을 감싼다. 다만 세정은 감싼 기름을 물과 함께 흘려보내고, 유화는 감싼 기름을 제품 안에 머물게 한다. 내보내느냐 잡아두느냐. 거품 나는 세정제가 되느냐 매끄러운 크림이 되느냐의 갈림길이, 실은 이 한 끗 차이다. 클렌징오일이 그 둘을 한 제품에서 보여준다. 처음엔 기름으로 메이크업을 녹여 품고 있다가, 물을 만나는 순간 유화되어 뿌옇게 변하고는 그대로 헹겨 나간다. 잡아두기에서 내보내기로 넘어가는 장면이다.
그러면 SLS는 정말 위험한가
섹션 제목: “그러면 SLS는 정말 위험한가”세정 이야기를 했으니 가장 말 많은 성분 하나를 짚고 가자. 샴푸 뒷면에 ‘SLS 무첨가’라 적힌 그 SLS, 소듐라우릴설페이트다. 음이온성 계면활성제의 대표 격으로 세정력과 거품이 좋아 오래 쓰여 왔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이것이 암을 일으킨다는 말이 떠돈다. 자극과 발암을 갈라서 보아야 한다.
자극은 사실이다. SLS는 피부 자극 연구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표준 자극원일 만큼, 농도가 높아질수록 피부를 건조하고 거칠게 만든다. 각질층에 침투해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늘린다. 규제기관의 안전성 평가에도 분명히 적힌 실재하는 성질이다.
그러나 발암은 사실이 아니다. SLS는 국제암연구소(IARC)를 비롯해 어느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도 발암물질로 분류된 적이 없다. ‘SLS가 암을 일으킨다’는 주장은 1998년 무렵 퍼진 인터넷 괴담으로, 피부를 자극한다는 진짜 사실에 발암이라는 허구를 슬쩍 얹은 이야기다. 자극이 있다는 것과 암을 일으킨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그래서 더 순한 대안으로 SLES, 소듐라우레스설페이트가 자주 쓰인다. SLS에 짧은 사슬을 몇 개 덧붙인 구조인데, 분자가 커져 피부에 덜 침투하고 단백질을 변성시키는 힘도 약해진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SLS보다 순한 경향을 보인다. 다만 무조건 더 순하다고 못 박을 수는 없다. 한 비교 연구에서는 같은 농도의 SLES가 SLS보다 오히려 건조감을 더 준 사례도 있었다. 자극은 분자의 종류만이 아니라 농도와 닿는 시간, 사람마다 다른 피부 상태에 크게 좌우된다.
여기서 앞에서 본 임계미셀농도가 다시 등장한다. 피부에 침투해 자극을 일으키는 주범은 미셀이 아니라 홀로 떠다니는 낱개 분자다. 그런데 임계미셀농도를 넘어서면 더 넣은 분자는 모두 미셀로 들어가므로, 낱개 분자의 양은 그 위로 거의 늘지 않는다. 농도를 마냥 높여도 자극의 주범이 비례해 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순한 세정제를 설계하는 한 가지 길이 바로 이 낱개 분자를 줄이는 데 있다. 미셀이라는 개념이 마케팅 용어를 넘어 제품의 자극까지 좌우하는 셈이다.
결국 ‘SLS 무첨가’는 절반의 진실이다. SLS를 빼면 더 순하게 만들 여지가 생기지만, 무첨가 자체가 안전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쓰는 성분도 농도가 높으면 자극을 준다. 계면활성제는 본래 기름때를 떼어내는 일을 하므로, 너무 세게 자주 씻으면 피부가 스스로 지키려 깔아둔 지질까지 함께 쓸려 나간다. 잘 씻는다는 것은 박박 씻는 것이 아니다.
셋이 벌이는 게임
섹션 제목: “셋이 벌이는 게임”화장품을 끝까지 분해하면 결국 세 가지가 남는다. 물과 기름, 그리고 둘을 중매하는 계면활성제다. 물은 무대를 깔고 기름은 매끄러움과 보호를 맡지만, 그 둘을 한자리에 앉히고 무엇을 할지 정하는 것은 계면활성제다. 떼어 내보내면 세정제가 되고, 감싸 붙잡으면 크림이 된다. 화장품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쥔 것은 이 셋째 손이다.
지금까지는 물에 녹는 작은 분자들의 세계를 다뤘다. 다음 강의에서는 덩치 큰 손님을 들인다. 묽은 물을 크림처럼 되직하게 붙잡아 두고, 머리카락에 막을 입히고, 한 방울로 끈끈한 젤을 만드는 거대 분자, 고분자다. 작은 분자 여럿이 사슬처럼 길게 이어진 이 분자가 화장품의 질감을 어떻게 좌우하는지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