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시험 — 전성분표 완독
첫 시간에 펼쳐 두었던 그 목록을 다시 꺼낸다. 정제수, 부틸렌글라이콜, 나이아신아마이드, 페녹시에탄올. 그때는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외계어였다. 이제 같은 이름들을 두고, 이것이 물인지 기름인지 거품을 내는 것인지 짚을 수 있는지 시험할 차례다. 졸업 시험에 새 내용은 없다. 배운 것을 한 라벨 위에서 전부 꺼내 쓰면 된다.
시작 전에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둔다. 여기서 분해하는 제품 셋의 성분 구성은 인용 시점인 2026년 6월의 공개 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시판 제품의 전성분은 국가별 판본과 제조사 리뉴얼, 생산 로트에 따라 바뀌므로, 실제로 확인할 때는 손에 든 제품의 라벨이 언제나 우선이다. 아래 분석은 성분 구성이 어떻게 짜였는가를 읽는 연습일 뿐, 어느 제품이 더 좋다는 평가가 아니다.
실습 하나 — 물이 1등이 아닌 라벨
섹션 제목: “실습 하나 — 물이 1등이 아닌 라벨”첫 시험지는 에센스다. 코스알엑스 어드밴스드 스네일 96 뮤신 파워 에센스. 공개된 전성분의 첫 줄은 물이 아니라 달팽이점액여과물(Snail Secretion Filtrate)이다. 0강에서 익힌 첫 번째 규칙—많이 든 것부터 적는다—을 그대로 적용하면, 이 제품의 바탕은 물이 아니라 점액여과물이고, 제품명의 ‘96’이 그 함량을 내세운 표기다. 물이 늘 1등이라던 법칙의 예외인데, 사실 예외랄 것도 없다. 점액여과물 자체가 대부분 수분에 당단백질이 섞인 것이라, 물이 형태를 바꿔 맨 앞에 앉은 셈이다.
그다음은 베타인, 부틸렌글라이콜, 1,2-헥산다이올, 소듐하이알루로네이트로 이어진다. 베타인과 소듐하이알루로네이트는 수분을 끌어오는 휴멕턴트, 곧 보습제다(21강). 부틸렌글라이콜은 이름이 -올로 끝나는 다가알코올로, 술의 에탄올과는 다른 식구이고 용제와 보습을 겸한다(9강). 뒤로 가면 판테놀·알란토인 같은 활성성분, 그리고 묽은 액체를 붙잡아 점도를 주는 점증제 카보머가 나온다(11강). 맨 끝의 페녹시에탄올은 제품이 상하지 않게 지키는 대표 방부제다(22강).
여기서 1% 경계를 추정해 본다. 카보머 같은 점증제와 페녹시에탄올 같은 방부제는 보통 1%도 안 되게 들어가 뒤쪽에 몰린다. 그러니 대략 알란토인 언저리부터 뒤는 ‘1% 이하 구간’으로, 적힌 순서가 함량 순위를 뜻하지 않는다. 정확한 함량은 영업비밀이라 공개되지 않으니, 어디까지나 위치로 읽는 추정이다.
실습 둘 — 여덟 식구가 다 보이는 라벨
섹션 제목: “실습 둘 — 여덟 식구가 다 보이는 라벨”두 번째 시험지는 수분크림이다. 세라브 모이스처라이징 크림. 0강에서 꼽은 여덟 식구—물, 유성 성분, 계면활성제, 점증제, 보습제, 방부제, 활성성분, 색·향—가 이 라벨 하나에 거의 다 들어 있다.
첫 줄은 정제수(Aqua), 물과 기름이 섞인 크림에서 바탕을 이루는 정석적인 구성이다(3강). 2위 글리세린은 대표 휴멕턴트라 보습에 무게를 둔 설계임을 짐작하게 한다(21강). 이어지는 세테아릴알코올과 세틸알코올은 ‘알코올’이라는 이름에 속기 쉽지만, 술의 에탄올이 아니라 발림성과 점도를 잡는 왁스성 지방알코올이다(8·9강). 카프릴릭/카프릭트라이글리세라이드는 가벼운 에스터 오일이고(8강), 세테아레스-20은 물과 기름을 잇는 유화제, 곧 계면활성제다(10강). 페트롤라툼은 수분이 날아가지 못하게 막을 덮는 폐색제다(8·21강).
라벨 중간쯤에서 세라마이드 세 종과 콜레스테롤이 나온다. 피부 장벽을 이루는 지질로, 19강에서 본 벽돌과 시멘트 구조의 그 시멘트에 해당한다(16·21강). 그 사이에 낀 다이메티콘은 보호막과 발림성을 맡는 실리콘이다(11강). 뒤쪽으로는 짝을 이루는 방부제 페녹시에탄올과 에틸헥실글리세린, 금속이온을 붙잡아 제품을 안정시키는 킬레이트제 다이소듐이디티에이(EDTA), 산패를 막는 항산화제 토코페롤(비타민 E), 천연 점증제 잔탄검이 차례로 적힌다(11·12·15·20·22강).
이 제품의 간판인 세라마이드는 라벨 한가운데, 1% 이하로 짐작되는 구간에 있다. 뒤에 있으니 별 의미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효능을 노리는 활성성분은 원래 아주 적은 양으로 설계된다(23강). 위치가 뒤라고 ‘적게 들었으니 무의미하다’로 읽으면 안 된다.
| 위치 | 성분 | 8대 분류 | 해당 강 |
|---|---|---|---|
| 1 | 정제수 (Aqua) | 용매 | 3 |
| 2 | 글리세린 | 보습 | 21 |
| 3·5 | 세테아릴/세틸알코올 (지방알코올) | 유성 | 8·9 |
| 4 | 카프릴릭/카프릭트라이글리세라이드 (에스터오일) | 유성 | 8 |
| 6 | 세테아레스-20 (유화제) | 계면활성제 | 10 |
| 7 | 페트롤라툼 (폐색제) | 유성 | 8·21 |
| ── | ────── 1% 경계 (추정) ────── | ||
| 9~11 | 세라마이드 NP/AP/EOP (배리어지질) | 활성 | 16·21 |
| 12·23 | 카보머 / 잔탄검 | 점증제 | 11 |
| 13 | 다이메티콘 (실리콘) | 유성 | 11 |
| 17 | 콜레스테롤 (배리어지질) | 활성 | 16 |
| 18·24 | 페녹시에탄올 · 에틸헥실글리세린 | 방부 | 22 |
| 19 | 다이소듐EDTA (킬레이트) | 방부 | 12·15 |
| 21 | 토코페롤 (비타민 E) | 활성/방부 | 20 |
전성분은 2026-06 기준이며 실제 제품 라벨이 우선
실습 셋 — 활성성분이 따로 모여 있는 라벨
섹션 제목: “실습 셋 — 활성성분이 따로 모여 있는 라벨”세 번째 시험지는 자외선차단제다. 라로슈포제 안텔리오스의 미국 판매판을 예로 든다. 이 라벨은 앞의 둘과 생김새가 다르다. 성분이 두 토막으로 나뉘어, ‘활성성분(Active ingredients)‘과 ‘나머지 성분(Other ingredients)‘이 따로 적혀 있다.
활성성분 칸에는 아보벤존 3%, 호모살레이트 13%, 옥티살레이트 5%, 옥토크릴렌 10%처럼 자외선필터가 함량까지 붙어 모여 있다(13강). 나머지 성분 칸으로 내려가면 그제야 물이 첫 줄에 나오고, 그 아래로 실리콘과 글리세린, 나이아신아마이드, 토코페롤, 페녹시에탄올이 함량순으로 늘어선다.
이 구조는 미국 규정의 특성이다. 미국은 자외선차단제를 일반의약품(OTC)으로 다뤄, 자외선필터를 약효 성분으로 보고 따로 떼어 함량까지 밝히게 한다. 한국과 유럽은 다르다. 같은 필터들이 별도 칸 없이 다른 성분과 한 줄로 섞여 함량순으로 나열된다. 그러니 같은 제품이라도 어느 나라 라벨이냐에 따라 ‘활성성분이 어디 있나’라는 질문의 답이 달라진다. 나이아신아마이드가 미국 라벨에서 나머지 성분 칸에 들어간 것도, 미국 기준으로는 자외선차단의 약효 성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벨을 받으면 던지는 질문들
섹션 제목: “라벨을 받으면 던지는 질문들”시험지 세 장을 풀었으니, 처음 보는 라벨을 받았을 때 순서대로 던질 질문을 정리한다. 새로 외울 것은 없다. 그동안 배운 개념을 차례로 호출하는 점검표일 뿐이다.
물이 1위인가부터 본다. 맨 앞이 물이면 수성 베이스이고, 점액여과물이나 꽃수가 1위라면 베이스가 무엇으로 바뀌었는지 확인한다(3·5강). 다음은 1% 경계가 어디인가다. 카보머·잔탄검 같은 점증제, 페녹시에탄올, EDTA, 향료가 나오기 시작하는 지점부터 뒤쪽은 대개 1% 미만이라, 그 경계 위만 함량순이 보장되고 아래는 순서를 함량으로 읽으면 안 된다(5강). 그다음은 지방알코올·오일·실리콘·유화제·점증제의 면면으로 제형의 골격을 읽어, 이것이 토너인지 크림인지 거꾸로 짚는 일이다(8·9·10·11강).
활성성분이 어디 있는지도 본다. 세라마이드든 나이아신아마이드든 자외선필터든, 효능 성분은 보통 1% 이하 뒷부분에 있고 그래도 무의미하지 않다. 자외선차단제라면 나라별 표기 구조부터 확인한다(23·13강). 보습 축은 휴멕턴트와 폐색제, 장벽 지질의 조합으로 읽고(21·17강), 방부와 안정화는 페녹시에탄올·EDTA·토코페롤로 본다. 방부제가 들었다고 나쁜 제품인 것은 아니다(22·20·12·15강). 향료와 색소도 짚는다. ‘향료’는 여러 성분을 묶은 표기이고, 그중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는 25종(한국 기준)은 일정 함량을 넘으면 따로 이름을 적게 되어 있다. 씻어내는 제품은 0.01%, 씻어내지 않는 제품은 0.001%를 넘을 때다. 색소는 보통 맨 끝에 모인다(0·14강).
마지막 질문은 앞면을 향한다. ‘무첨가’라고 적힌 글자와 뒷면의 전성분은 따로 본다. 앞면 카피는 마케팅이고, 실제 구성은 뒷면에 있다. 모르는 성분이 보이면 직접 찾아볼 수 있다. 식약처 의약품안전나라의 원료성분정보, 대한화장품협회 성분사전(kcia.or.kr/cid), 유럽연합의 코싱(CosIng), 민간 사이트인 인키데코더(INCI Decoder) 같은 도구가 있다. 다만 어느 것도 만능은 아니다. 협회 성분사전은 명칭을 표준화할 뿐 사용 가능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고, 코싱도 정보 제공이 목적일 뿐 법적 효력은 없다고 밝힌다. 등재돼 있다는 사실이 곧 안전 보증은 아니며, 성분 이름만으로는 함량도 제형도 pH도 알 수 없으니 위험을 단정할 수 없다. 이 도구들은 무슨 성분인지 알려줄 뿐, 이 제품이 좋은지를 판정해 주지는 않는다.
라벨을 받으면 순서대로 던지는 8가지 질문 흐름도 — 물 1위 → 1% 경계 → 제형 골격 → 활성성분 → 보습 축 → 방부·안정화 → 향료·색소 → 무첨가 카피
첫 시간에 화장품 뒷면의 작은 글씨는 외계어처럼 보였다.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같은 목록을 펼치면 다르게 보인다. 맨 앞의 물은 바탕이고, 그 뒤의 글리세린은 수분을 끌어오며, 이름이 -올로 끝나는 것 중 어떤 것은 술이 아니라 왁스이고, 끝자락의 페녹시에탄올은 제품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무엇이 얼마나, 어떤 목적으로 들었는지가 읽힌다.
성분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이름을 해독하는 재주가 아니다. 마케팅의 과장과 근거 없는 공포 사이에서 스스로 판단할 자리를 얻는 일이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원자와 분자에서 출발해,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이유와 그 둘을 잇는 계면활성제, 묵은 각질만 골라 녹이는 효소, 산화를 대신 떠안는 항산화제를 지나왔다. 그 모든 것이 이제 한 장의 라벨 위에 모여 읽힌다.
외계어가 아니라, 충분히 읽히는 한 편의 글. 그 약속을 첫 시간에 했고, 여기서 지킨다. 졸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