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염기, 그리고 pH
클렌저 광고에서 자주 보는 말이 있다. “피부의 pH 밸런스를 지켜줍니다.” 균형을 지켜준다니 좋은 말 같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상하다. 균형이라면 대체 무엇과 무엇의 균형인가. 가운데를 맞춘다는 뜻이라면, 그 가운데는 어디인가.
상식대로라면 답은 중간, 즉 산성도 염기성도 아닌 중성일 것 같다. 그런데 아니다. 피부가 지키려는 자리는 한가운데가 아니라, 산성 쪽으로 꽤 치우친 곳이다. 이 한 문장의 의미를 풀어내려면 산과 염기가 무엇인지, pH라는 숫자가 무엇을 재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산과 염기는 무엇을 주고받는가
섹션 제목: “산과 염기는 무엇을 주고받는가”산과 염기는 물속에서 작은 입자 하나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 입자는 수소이온, 기호로 H⁺다. 산은 이 H⁺를 내놓는 쪽이고, 염기는 받는 쪽이다. 정의는 이게 거의 전부다. 산은 주는 자, 염기는 받는 자.
물 자체도 이 거래에 끼어 있다. 순수한 물은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아주 적은 양이 늘 H⁺와 짝꿍 입자로 갈라졌다 다시 붙기를 반복한다. 이 둘이 똑같은 양으로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그 물을 중성이라 부른다. 여기에 산을 넣으면 H⁺가 많아지고, 염기를 넣으면 H⁺가 줄어든다. 산성과 염기성의 차이는 결국 물속에 H⁺가 얼마나 붐비느냐의 차이다.
여기서 오해 하나를 짚고 가자. ‘산성’이라고 하면 따갑고 위험한 것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마시는 식초도, 레몬즙도 산성이다. 산성이라는 성질 자체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하고 얼마나 오래 닿느냐가 위험을 만든다. 반대로 ‘알칼리는 순하다’는 생각도 사실과 다르다. 뒤에서 보겠지만, 피부에는 오히려 알칼리 쪽이 더 부담스럽다.
pH — 한 칸에 10배
섹션 제목: “pH — 한 칸에 10배”H⁺가 얼마나 붐비는지를 하나의 숫자로 나타낸 것이 pH다. 0부터 14까지의 눈금이 있고, 가운데인 7이 중성이다. 7보다 작으면 산성, 크면 염기성이다. 숫자가 작을수록 H⁺가 붐비는 산성, 클수록 한산한 염기성이라고 기억하면 된다.
그런데 이 눈금에는 함정이 하나 있다. 보기에는 1, 2, 3 한 칸씩 나란한 평범한 자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한 칸 내려갈 때마다 H⁺가 10배씩 불어난다. 지진의 규모를 떠올리면 감이 온다. 규모 5와 규모 6은 숫자로는 1 차이지만, 실제로 풀려난 에너지는 수십 배 차이다. pH도 그렇다. 눈금 한 칸이 곧 10배다.
이 점을 모르면 큰 착각을 한다. 흔히 ‘pH 5.5는 7에 가까우니 거의 중성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러나 5.5는 7보다 H⁺가 30배 가까이 많다. 거의 중성이기는커녕 분명한 산성이다. 피부의 pH가 5 안팎이고 비누가 9에서 10쯤이라면, 숫자로는 네다섯 칸 차이지만 H⁺의 양으로 따지면 수만 배가 벌어진다. 작아 보이는 눈금 차이가 실제로는 까마득한 거리인 셈이다.
7이 중성, 왼쪽이 산성·오른쪽이 염기성 — 한 칸 내려갈 때마다 H⁺가 10배씩 불어난다
피부는 약산성이라는 외투를 두른다
섹션 제목: “피부는 약산성이라는 외투를 두른다”이제 처음의 광고 문구로 돌아간다. 건강한 피부 표면은 중성이 아니라 약산성이다. 흔히 pH 4.5에서 5.5 사이로 이야기하고, 잔류물 없이 가장 정밀하게 잰 측정에서는 평균이 4.7 안팎, 5 아래로 나온다. 어느 쪽이든 한가운데인 7이 아니라 산성 쪽으로 기운 자리다.
피부가 이 산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표면에는 땀 속의 젖산, 피지에서 나온 지방산, 각질이 만들어지고 떨어지는 과정의 부산물이 한데 섞여 옅은 산성의 막을 이룬다. 이것을 산성막이라 부른다. 피부가 두른 약산성 외투인 셈이다. 이 외투는 그냥 덮여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바깥의 해로운 세균은 산성 환경을 싫어해 자리 잡기 어렵고, 피부 장벽을 정비하고 묵은 각질을 떼어내는 일도 이 약산성에서 가장 매끄럽게 돌아간다.
그래서, 약산성 클렌저란
섹션 제목: “그래서, 약산성 클렌저란”여기까지 오면 ‘약산성 클렌저’라는 말의 진짜 의미가 보인다. 핵심은 피부의 약산성 환경을 가급적 덜 흔드는 세정이다.
전통적인 비누는 만들어지는 원리상 알칼리성이다. 세정력은 좋지만 피부 표면을 알칼리 쪽으로 밀어, 장벽을 이루는 단백질과 지질을 부풀리고 당기는 느낌을 남기기 쉽다. 이에 비해 약산성 클렌저는 다른 종류의 세정 성분을 써서 피부 본래의 pH에 가깝게 맞춘다. 그래서 피부가 예민한 사람, 아토피나 여드름이 있는 경우 약산성 쪽이 더 권장된다.
다만 균형 잡힌 시선이 필요하다. 알칼리 비누로 한 번 씻었다고 산성막이 부서지는 것은 아니다. 건강한 피부라면 씻은 뒤 올라간 pH는 대개 수십 분에서 몇 시간 안에 제자리로 돌아온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한 번의 세안이 아니라, 자극에 약한 피부에서 알칼리 세정이 매일 반복되며 쌓이는 부담이다. 그러니 ‘pH 5.5’라는 표기 하나가 좋은 제품을 보증하지도 않는다. 그 숫자는 피부 생리에 가깝다는 신호일 뿐, 세정 성분이 순한지 아닌지는 또 다른 이야기다.
처음의 ‘pH 밸런스’로 돌아가 보자. 그 말이 가리키는 균형은 한가운데인 중성이 아니라, 피부 본래의 약산성을 크게 흔들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다. 표현이 다소 모호할 뿐, 가리키는 자리는 분명 5 안팎의 산성 쪽이다.
다음 강 예고
섹션 제목: “다음 강 예고”pH는 이 한 강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앞으로 여러 번 다시 돌아올 변수다. 묵은 각질을 떼어내는 효소는 아무 때나 일하지 않고 특정 pH에서만 제대로 힘을 쓴다(18강). 제품이 상하지 않게 지키는 방부 설계에서는 낮은 pH 자체가 미생물을 막는 무기가 된다(22강). 비타민C나 AHA 같은 활성성분도 그 효과와 안정성이 제형의 pH에 좌우된다(23강). 오늘 익힌 ‘한 칸에 10배’라는 감각은 그 모든 자리에서 다시 꺼내 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