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산과 오일 — 기름의 정체
올리브유는 냉장고에 넣어도 흐른다. 그런데 버터나 코코넛유는 같은 칸에서 단단하게 굳는다. 둘 다 ‘기름’이라 부르는데 하나는 차게 식혀도 흐르고 하나는 칼로 잘라야 한다. 어느 쪽이든 물에 떨어뜨리면 섞이지 않고 동그랗게 뭉쳐 떠오르는 것도 똑같다.
왜 기름은 끈적할까. 왜 물과 섞이지 않을까. 같은 기름인데 왜 어떤 것은 흐르고 어떤 것은 굳을까. 세 질문의 답은 거의 한 곳으로 모인다. 분자의 생김새, 정확히는 긴 사슬 하나가 곧으냐 꺾였느냐다. 성분표에 줄줄이 적힌 ‘천연 오일’들의 정체도 결국 이 한 가지 구조로 풀린다.
머리 하나에 긴 꼬리 하나
섹션 제목: “머리 하나에 긴 꼬리 하나”기름을 이루는 기본 단위는 지방산이다. 7강에서 성분명 끝의 ‘-산’은 카복실기(-COOH)라는 작용기의 힌트라고 했다. 스테아르산, 올레산, 리놀레산. 성분표에서 마주치는 이 ‘-산’들이 바로 지방산이고, 그 이름 끝의 ‘산’이 7강에서 깔아둔 바로 그 카복실기다.
지방산의 생김새는 단순하다. 한쪽 끝에 카복실기 머리가 있고, 거기에 탄소와 수소로 이루어진 긴 꼬리가 달려 있다. 성냥을 떠올리면 쉽다. 둥근 머리 하나에 가느다란 막대 하나. 머리는 물과 어느 정도 친하고, 막대인 긴 탄화수소 꼬리는 물을 밀어낸다.
여기서 기름이 물과 안 섞이는 이유가 나온다. 3강에서 물은 전기적으로 한쪽에 치우친 극성 분자라고 했다. 끼리끼리 섞인다는 것이 용해의 기본 원칙이라, 극성인 물은 비극성인 것을 밀어낸다. 그런데 지방산의 긴 꼬리는 탄소와 수소만으로 이루어져 전기적으로 거의 평평한 비극성이다. 머리만 물을 조금 좋아할 뿐, 긴 꼬리가 분자 전체를 비극성으로 끌고 간다. 한쪽 끝만 물을 좋아하는 반쪽짜리인 셈이다. 이 어정쩡함을 양쪽 다 다루는 재주로 끌어올린 물질 이야기는 10강으로 미뤄둔다.
끈적한 이유도 이 꼬리에 있다. 긴 사슬들이 나란히 누워 약하게 들러붙고 얽히면, 흐를 때 서로를 붙들며 미끄러져 점성이 생긴다. 사슬이 길수록 더 끈적하다.
둥근 머리(-COOH, 물 좋아함)에 긴 탄화수소 꼬리(물 싫어함)가 붙은 성냥 모양.
곧은 막대와 꺾인 막대
섹션 제목: “곧은 막대와 꺾인 막대”이제 냉장고 속 올리브유와 버터의 차이로 돌아간다. 답은 꼬리의 모양에 있다.
지방산의 꼬리는 두 종류다. 탄소끼리 단일결합으로만 이어진 곧은 막대 같은 꼬리가 있고, 중간에 이중결합이 끼어 꺾인 막대 같은 꼬리가 있다. 앞쪽이 포화지방산, 뒤쪽이 불포화지방산이다. 포화란 수소로 가득 찼다는 뜻이고, 불포화는 이중결합 자리만큼 수소가 덜 찼다는 뜻이다. 2강에서 본 이중결합이 천연 지방산에서는 대개 사슬을 한쪽으로 꺾어 버린다.
여기서 굳음과 흐름이 갈린다. 곧은 막대는 서랍에 차곡차곡 포갤 수 있다. 막대끼리 빈틈없이 붙으면 서로 붙드는 힘이 강해져, 녹이려면 더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곧은 사슬의 포화지방산은 잘 굳고 녹는점이 높다. 반대로 꺾인 막대는 아무리 모아도 들떠서 헐겁게 쌓인다. 붙드는 힘이 약하니 낮은 온도에서도 쉽게 흐트러진다. 꺾인 사슬의 불포화지방산이 잘 흐르고 녹는점이 낮은 이유다.
수치로 보면 분명하다. 탄소 18개로 길이가 같은 세 지방산을 견주어 보자. 이중결합이 없는 스테아르산은 녹는점이 약 70℃다. 한참 뜨거워야 녹는다. 이중결합이 하나 생긴 올레산은 약 16℃로 뚝 떨어져 상온이면 이미 액체다. 이중결합이 둘인 리놀레산은 약 −5℃까지 내려가 냉장고에 넣어도 흐른다. 길이가 똑같은데도 꺾임이 하나 늘 때마다 녹는점이 계단처럼 내려간다.
곧은 막대는 빈틈없이 포개져 잘 굳고(포화), 꺾인 막대는 들떠 헐겁게 쌓여 잘 흐른다(불포화). (이미지: Wikimedia Commons, CC BY 4.0)
대체로 포화지방산이 많으면 상온에서 굳어 지방, 불포화지방산이 많으면 흘러서 오일이라 부른다. 다만 경향일 뿐 절대 규칙은 아니다. 코코넛유는 식물성인데도 포화지방산이 많아 상온에서 반쯤 굳는다.
꺾인 꼬리에는 약점이 하나 더 있다. 이중결합 자리는 산소의 공격에 약하다. 오래 둔 견과류나 기름에서 나는 쩐내가 그 흔적이다. 이 산패의 자세한 메커니즘은 20강 산화에서 풀어 보고, 여기서는 이중결합이 많은 불포화 오일일수록 더 빨리 상한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천연 오일의 정체
섹션 제목: “천연 오일의 정체”지금까지는 지방산 한 가닥을 보았다. 그런데 화장품에 들어가는 오일은 지방산이 홀로 떠다니지 않는다. 셋씩 묶여 있다.
글리세린이라는 작은 분자가 손잡이 역할을 한다. 글리세린은 탄소 세 개에 -OH가 세 개 붙은 분자다. 이 세 개의 -OH에 지방산이 하나씩 붙으면 손잡이에 지방산 세 가닥이 꽂힌 모양이 된다. 삼지창을 떠올리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분자가 트리글리세라이드다. 지방산의 머리와 글리세린의 -OH가 물 한 방울을 내놓으며 맞물리는 이 결합을 에스터 결합이라 하는데, 이름은 뒤에서 다시 만난다.
작은 폭로가 하나 있다. 올리브유, 아르간유, 동백유처럼 라벨은 제각각인 ‘천연 오일’들의 정체가 사실은 모두 이 트리글리세라이드다. 식물성 오일은 그 95% 안팎이 트리글리세라이드다. 라벨이 다른 이유는 손잡이에 어떤 지방산이 꽂혔느냐가 다를 뿐이다. 곧은 꼬리가 많이 꽂히면 잘 굳고, 꺾인 꼬리가 많으면 잘 흐른다. 앞에서 본 막대 이야기가 그대로 되풀이된다. ‘천연 오일’이라는 말 뒤에 화학이 없을 것 같지만, 트리글리세라이드는 분명한 화학 분자다. 자연에서 왔다고 화학이 아닌 것은 아니다. 1강에서 짚은 그대로다.
그래서 화장품에서는
섹션 제목: “그래서 화장품에서는”오일이 화장품에서 하는 일은 피부를 덮고 채워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비극성인 기름은 물과는 안 섞여도 피부 표면의 기름진 층과는 잘 어울려 얇은 막을 만들며 잘 퍼진다. 이 막이 피부를 부드럽게 하고 빠져나가는 수분을 붙잡는다. 이렇게 피부를 채우고 매끄럽게 하는 역할을 에몰리언트라 부르는데, 보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21강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처방하는 사람은 곧고 꺾인 지방산을 도구처럼 써서, 포화 성분이 많으면 크림·밤·스틱처럼 단단하게, 불포화 오일이 많으면 가볍고 묽게 사용감을 조절한다.
오일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코메도제닉 등급, 곧 모공을 막는 정도를 매긴 점수다. 그런데 이 등급의 출발은 1970년대에 토끼 귀에 성분을 발라 본 시험이었다. 토끼 귀는 사람 피부보다 훨씬 민감해 실제와 어긋나는 결과가 잦았고, 같은 성분도 농도를 낮추면 점수가 확 떨어진다. 등급을 만든 연구자 본인조차 성분 목록만 보고 어떤 제품이 여드름을 일으킬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니 코메도제닉 등급은 대략의 참고일 뿐, 어떤 오일을 두고 모공을 막는다고 잘라 말할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석유에서 왔으니 나쁘다는 미네랄오일 통념도 비슷하다. 화장품 등급의 미네랄오일이 모공을 막지 않는다는 연구가 있다. 식물성 오일과의 차이는 우열보다 역할에 가깝다. 식물성 오일은 항산화 성분 같은 미량 성분으로 영양을 더하지만 산패에 약하고, 미네랄오일은 그런 성분이 없는 대신 산화되지 않아 안정적이다.
다음 강 예고
섹션 제목: “다음 강 예고”남겨 둔 실마리가 있다. 지방산은 한쪽 끝만 물을 좋아하는 반쪽짜리였다. 이 성질을 양쪽 다 능숙하게 부리는 분자가 되면, 물과 기름을 한 그릇에 섞어 때를 씻어내는 일이 가능해진다. 물과 기름을 잇는 그 중매쟁이가 10강 계면활성제다. 오일의 등뼈였던 글리세린도, 떼어내면 그 자체로 물을 끌어당기는 보습제여서 오일이 에몰리언트라는 점과 함께 21강 보습의 과학에서 다시 만난다. 또 지방산 꼬리 끝의 카복실기(-COOH)를 -OH로 바꾸면 세틸알코올 같은 지방알코올이 되는데, 이름에 ‘알코올’이 붙었다고 다 같은 알코올은 아니라는 이야기는 바로 다음 9강에서 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