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경도와 미네랄
같은 클렌저, 같은 손, 같은 시간. 그런데 본가에서 세수하면 거품이 풍성하게 일고 헹군 뒤 얼굴이 뽀득한데, 어느 동네로 이사하거나 해외 숙소에서 씻으면 거품이 영 안 일고 아무리 헹궈도 피부가 뻑뻑하게 남는다. 비누 탓도, 손 탓도 아니다.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이 다르다.
3강에서 물을 “무대”라고 불렀다. 다른 성분을 녹여 피부에 전하는 바탕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무대 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님이 이미 와 있다. 물에 녹아든 미네랄이다. 이 손님의 양이 지역마다 다르고, 그 차이가 세수 느낌을 바꾼다. 오늘은 이 보이지 않는 손님, 곧 물의 경도에서 출발해, “미네랄”이라는 단어가 화장품 라벨에 붙었을 때 그것이 정말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따라가 본다.
물에는 미네랄이 녹아 있다
섹션 제목: “물에는 미네랄이 녹아 있다”수돗물을 한 컵 받아 두면 맑고 투명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광물이 녹아 있다. 빗물이 땅으로 스며 지하를 흐르는 동안, 물은 지나가는 암석을 조금씩 녹인다. 3강에서 물이 극성 용매라 잘 녹인다고 했던 그 성질이, 여기서는 땅속에서 일한다. 특히 석회암이나 백악처럼 칼슘이 많은 지층을 지나면 물은 칼슘과 마그네슘을 끌고 나온다. 그래서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질에 따라 물맛과 세수 느낌이 갈리고, 땅속 깊이 머문 지하수가 강이나 호수의 물보다 미네랄을 더 많이 품는다.
이렇게 물에 녹아든 칼슘과 마그네슘의 양을 가리키는 말이 경도다. 원래 경도는 “물이 비누와 얼마나 잘 반응하는가”를 재던 옛 척도였다. 지금은 물에 녹은 칼슘·마그네슘 이온의 총량을 뜻하는 말로 쓴다. 미네랄이 적게 녹은 물을 단물 또는 연수, 많이 녹은 물을 센물 또는 경수라 부른다.
양은 보통 mg/L로 적는데, 물에서는 ppm과 거의 같은 값으로 통한다. 국제 기준으로 60 mg/L가 안 되면 연수, 60에서 120 사이는 중간, 120을 넘으면 경수, 180을 넘으면 아주 센 물로 본다. 한국은 수돗물 경도를 300 mg/L 이하로 두도록 법으로 정해 두었다. 다만 이것은 넘지 말아야 할 상한선이지 평균값이 아니다. 지역마다 실제 경도가 얼마인지는 동네에 따라 다르므로, 한국 물이 일률적으로 단물이라거나 센물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오해부터 풀어 두자. 경도가 높으면 더러운 물이라는 생각이다. 칼슘과 마그네슘은 그 자체로 독성이 없어서, 세계보건기구나 미국 환경청 모두 경도에 건강 기준치를 두지 않는다. 센물은 위험한 물이 아니라, 주로 비누가 잘 안 풀리고 주전자에 하얀 물때가 끼는 정도의 살림 문제다. 반대로 단물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미네랄이 너무 적은 물은 오히려 금속 배관을 더 갉아내는 성질이 있다.
빗물이 석회암 지층을 통과하며 Ca·Mg를 녹여 경수가 되는 과정 + 경도 분류 눈금(연수~고경수)
센물에서는 왜 거품이 안 날까
섹션 제목: “센물에서는 왜 거품이 안 날까”이제 처음의 수수께끼로 돌아가자. 같은 비누인데 센물에서 거품이 안 이는 이유다. 범인은 물에 녹아 있던 그 칼슘과 마그네슘이다.
10강에서 비누 같은 계면활성제를 “머리는 물을 좋아하고, 꼬리는 기름을 좋아하는” 분자로 그렸다. 비누가 때를 씻어내는 것은 이 양쪽 성질 덕분이다. 그런데 비누의 일하는 손, 곧 물을 좋아하는 머리 쪽이 센물 속 칼슘에 그만 붙들려 버린다.
여기서 2강의 이온이 회수된다. 칼슘과 마그네슘은 +2가, 곧 양손잡이 집게 같은 이온이다. 손이 둘이라, 비누 분자 두 개를 양손으로 동시에 붙잡아 물에 녹지 않는 덩어리로 묶어 버린다. 이렇게 묶인 것이 비누 스컴이다. 비누가 안 풀리고 미끌거리며 남는 그 찌꺼기, 욕조 가장자리에 끼는 허연 띠가 바로 이것이다. 단물에 많은 나트륨은 +1가라 손이 하나뿐이어서 비누를 묶지 못한다. 그래서 단물에서는 비누가 멀쩡히 거품을 낸다.
비누가 칼슘에 붙들려 침전으로 빠져나가니, 거품을 낼 비누가 줄어든다. 그래서 센물에서는 거품이 잘 안 일고, 같은 만큼 씻으려면 비누가 더 들며, 미처 헹궈지지 않은 찌꺼기가 피부에 남아 뻑뻑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센물에서는 영영 못 씻는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10강이 한 번 더 회수된다. 비누는 칼슘에 약하지만, 요즘 클렌저에 흔히 쓰는 합성 계면활성제, 이를테면 설페이트나 이세티오네이트 같은 것들은 칼슘·마그네슘과 잘 엉기지 않아 센물에 훨씬 강하다. “센물에서도 잘 헹궈지는” 클렌저가 대개 이런 성분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니 “센물에서는 뭘로 씻든 소용없다”는 말은 옛날 비누에나 맞는 과장이다.
Ca²⁺(양손잡이 집게)가 비누 음이온 2개를 묶어 스컴으로 침전 vs Na⁺는 한 손이라 안 묶임
센물과 피부 질환을 엮는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 센물 지역에서 어린이 아토피가 더 흔하더라는 보고가 있고, 세계보건기구도 센물이 습진을 악화시키는 위험인자로 거론되어 왔다고 적는다. 다만 같은 문서가 곧바로 덧붙인다. 구체적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치료 실험의 결과다. 센물 지역 어린이 수백 명의 집에 연수기를 달고 석 달을 지켜본 무작위 대조시험에서, 연수기를 단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습진 호전 정도에 의미 있는 차이가 없었다. 연구진의 결론은 분명했다. 연수기를 아토피 치료법으로 권할 수 없다. 상관관계가 비친다는 것과 원인이라는 것은 다르고, 물을 부드럽게 바꾼다고 증상이 낫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미네랄 워터” 화장품은?
섹션 제목: “그래서, “미네랄 워터” 화장품은?”여기서 묘한 뒤집기가 일어난다. 방금까지 칼슘과 마그네슘은 비누를 망치고 피부에 찌꺼기를 남기는, 다소 성가신 손님이었다. 그런데 화장품 매대로 자리를 옮기면 같은 미네랄이 갑자기 몸에 좋은 무엇처럼 팔린다. “미네랄 워터” 화장수, “온천수” 미스트가 그렇다.
먼저 마시는 물부터 보자. 우리가 하루에 섭취하는 칼슘·마그네슘 가운데 물이 대는 몫은 5%에서 20% 정도다. 나머지는 음식에서 온다. 그러니 물로 미네랄을 채운다는 말은 영양학적으로도 큰 비중이 아니다. 하물며 피부에 바르는 물에 든 미네랄이 안으로 스며 영양을 준다는 주장은 더 멀다. “미네랄”이라는 단어는 “유기농”처럼 몸에 좋아 보이는 후광을 두를 뿐, 그 자체로 피부 효능을 보장하지 않는다.
온천수는 어떨까. 셀레늄이 풍부한 온천수, 광물 함량이 낮고 부드러운 온천수를 핵심 성분으로 내세우는 화장품이 있다. 진정과 보습에 도움이 된다는 신호가 일부 연구에 나타나기는 한다. 다만 그 근거를 들여다보면 사정이 간단치 않다. 동물이나 시험관 수준에 머문 것이 많고, 제조사와 연관된 연구도 적지 않아 그대로 받아들이기 조심스럽다. 온천욕의 피부 효과를 모은 종합 연구들도 건선이나 습진에 나아지는 경향은 보고하지만, 하나같이 연구의 질이 낮고 수가 적다고 스스로 밝힌다.
그러니 온천수·미네랄 화장수의 현실적인 쓸모는 수분을 더하고, 잠시 진정시키고, 청량감을 주는 정도로 보는 편이 안전하다. 진정이나 보습의 약한 신호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온천수가 피부를 치료하고 재생시킨다”는 단정은 근거가 받쳐 주지 못한다. 화장품은 본래 이런 의약품 같은 효능을 내세울 수 없도록 규제받는다. 미네랄이 들었다는 사실보다, 그 물이 무엇을 한다고 검증됐는지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물에는 미네랄만 있는 게 아니다
섹션 제목: “물에는 미네랄만 있는 게 아니다”지금까지 3부에서는 물과 그 안에 녹은 무기물, 곧 이온과 산과 염기, 그리고 오늘의 칼슘·마그네슘을 따라왔다. 한 컵의 맑은 물조차 그냥 물이 아니라, 땅을 지나며 광물을 품은 용액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물에는 미네랄만 있는 게 아니다. 미생물도 산다. 그래서 화장품에는 미생물이 함부로 자라지 못하게 막는 장치가 필요하고, 어떤 온천수 화장품은 거꾸로 그 물에 살던 미생물에서 얻은 성분을 일부러 담는다. 물질에서 생명으로, 이제 4부에서는 살아 있는 것들의 화학으로 넘어간다. 화장품 안에서 자라는 것, 막아야 하는 것, 그리고 피부 위에 사는 것들의 이야기다.